A Post Entitled 칼 폴라니 그리고 혜강 최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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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와 2000년대의 초반, 혜강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 동양철학자들은 물론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은 과학철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이 모두 혜강의 저술에 몰려들었었다. 고전국역의 첫머리에 혜강의 <기측체의>가 끼어 있었고, 도올도 <독기학설>을 비롯 혜강에 대한 몇 권의 책과 논문을 발표했었다.

그 유행을 타고 나도 혜강을 읽었다.조선말 서양의 과학을 가장 최전선에서 받아들였던 인물로서 나에게 혜강은 우리의 과학정신을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사상가로 보였기 때문이다. 혜강의 사상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고, 전방위에 걸친 그의 <기학>의 사상사적 면면이 독특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자들에게 혜강은 무엇을 전해줄 수 있는가. 혹은 오늘날의 동양철학자들에게 있어 혜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답은 모호해진다. 예를 들어 몇몇 멍청한 인문학자들이 혜강의 기학을 통합과학으로 보려는 시도를 했었다. 정말 멍청한 짓이다. 혜강의 사상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저 사상일 뿐이다. 동양철학자들에게 혜강은 연구대상으로 머물수도 있겠지만, 학문적 관심을 넘어 혜강은 그들에게 실천적 대상이 되어야 했다.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의 학문체계에 과학이라는 실증적 학문으로 숨결을 불어넣으려 했던 혜강의 실천적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모두들 신들린 듯 혜강을 부르짖을 뿐이었다. 예수가 성경속에만 있고 그 실천적 모습이 사라져가는 대한민국의 개신교처럼, 사상가로서의 혜강은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혜강을 강독하고 도올을 찾았다. 혜강의 우주론이 현재의 과학자들에게 무엇을 뜻하느냐고 그에게 물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학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세계, 즉 Umbelt에 대한 이해방식이라고 본다. 그러한 이해방식이라고 본다면 형이상학적 이해방식과 과학적 이해방식의 그 궁극적 메시지는 통할 수 있다. 적어도 논리적 구조에서는. 즉, 최한기의 메시지에도 현대물리학의 메시지는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여기서 전통을 공부하는 이들의 국수주의적 발언이 유도되어 최한기는 현대물리학자들보다 위대하다는 비약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이기 때문에 논리적 사유구조에 공통성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을 동일한 차원에서 학문적 성과로 바로 대비하는 것은 곤란하다. 도올 인터뷰 전문

경제학은 과학과 성격이 다른 학문체계다. 우리의 삶에 과학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과학은 기술(공학)적 발전이나, 드물게 사상적 영향력으로 가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공학은 과학의 직접적 응용이 아니다. 공학은 그 자체의 진화적 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과학과 상호작용한다. 하지만 경제학은 아니다. 경제학은 과학과 공학의 상호관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학문체계다. 경제학의 과학적 성격은 직접 경제학의 공학적 성격으로 전이된다. 경제학의 사상적 측면이 우리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과학처럼 간접적이고 지연된다.

현재의 세계적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칼 폴라니를 다시 읽는다고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폴라니를 사상사로 읽을 것인가, 혹은 문제해결을 위한 공학적 응용으로 읽을 것인가. 혜강이 현대 과학자들에게 실천적 측면을 제외하고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듯이, 폴라니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사상사에 대한 자각이 쓸모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현장에 있는 경제학자들에게 폴라니에 대한 공학적 강조는 무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우리가 폴라니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이론적 도그마에 대항한 일상의 반발, 추상적 단순화에 대항한 구체적 복잡성에 대한 강조, 과도한 일반화에 대항한 상식적 특수성의 확보 정도가 될 지 모른다.

아마도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는, 폴라니로부터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폴라니의 문제의식을 재확인하고, 현장의 방법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군의 경제학자들로부터 풀려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미 수십년도 더 되어버린 폴라니의 이론이 아니라, 아마도 폴라니를 직간접적으로 대면하고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실천을 고민하는 그런 현장의 인물들에게서 찾아질 것이다. 폴라니는 대안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강력하게 옥죄고 있는 경제시스템의 위기를 조금 더 일찍 자각한 사상가일 뿐이다. 그가 현장의 경제학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상적 세례이지, 문제해결이 될 수는 없다.

폴라니를 문제해결의 완벽한 지침서로 읽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사상이란 목표를 정해줄 뿐, 문제해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위대한 것은 사상의 세례를 받고, 땅에 발을 딛은 채 현실과 부딪히고 있는 공학자들이지 하늘을 나는 사상가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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