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ost Entitled 아담 스미스 vs 마르셀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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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이해’를 중심으로 이론을 건설한 아담 스미스가 아니라, ‘이해’와 ‘호혜’를 통일적으로 파악한 모스에게서 시작되었다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방법론적 환원주의를 사용함으로서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을 일종의 과학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세상을 당구공 두개로 환원시켜버린 뉴턴의 무모함, 중력이라는 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가정했던 뉴턴의 무모함이 철저히 논리적으로 그리고 오히려 상식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던 데카르트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고전역학을 탄생시켰다.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다는 일상의 진리를 물리학에 우겨 넣으려면 프리고진은 그 지점에서 실패했다. 시간의 비가역성은 열역학의 전통 속에서 이론적 제한을 가진다. 프리고진의 상식적 사고는 과학이 발전할 수록 이론의 적용 범위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상식을 배반하는 데서 역설을 맞는다. 뉴턴으로부터 아인슈타인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가역적 시간관은 그들이 건설한 물리학적 대상에 관한한 나름의 역할을 해냈다. 그것이 비록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궤변으로 보였을지언정 그 괴기함 속에 숨어 있는 단순화와 추상화의 원리가 과학이 힘을 얻는 동력인지 모른다.

따라서 모스에게서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모스에게서 일상에서의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측면, 경제학이 자연과학이 아님으로서 갖게 되는 또 다른 측면에 대한 고민을 배우면 그 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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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st Entitled 칼 폴라니 그리고 혜강 최한기

posted 2 years ago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초반, 혜강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 동양철학자들은 물론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은 과학철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이 모두 혜강의 저술에 몰려들었었다. 고전국역의 첫머리에 혜강의 <기측체의>가 끼어 있었고, 도올도 <독기학설>을 비롯 혜강에 대한 몇 권의 책과 논문을 발표했었다.

그 유행을 타고 나도 혜강을 읽었다.조선말 서양의 과학을 가장 최전선에서 받아들였던 인물로서 나에게 혜강은 우리의 과학정신을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사상가로 보였기 때문이다. 혜강의 사상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고, 전방위에 걸친 그의 <기학>의 사상사적 면면이 독특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자들에게 혜강은 무엇을 전해줄 수 있는가. 혹은 오늘날의 동양철학자들에게 있어 혜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답은 모호해진다. 예를 들어 몇몇 멍청한 인문학자들이 혜강의 기학을 통합과학으로 보려는 시도를 했었다. 정말 멍청한 짓이다. 혜강의 사상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저 사상일 뿐이다. 동양철학자들에게 혜강은 연구대상으로 머물수도 있겠지만, 학문적 관심을 넘어 혜강은 그들에게 실천적 대상이 되어야 했다.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의 학문체계에 과학이라는 실증적 학문으로 숨결을 불어넣으려 했던 혜강의 실천적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모두들 신들린 듯 혜강을 부르짖을 뿐이었다. 예수가 성경속에만 있고 그 실천적 모습이 사라져가는 대한민국의 개신교처럼, 사상가로서의 혜강은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혜강을 강독하고 도올을 찾았다. 혜강의 우주론이 현재의 과학자들에게 무엇을 뜻하느냐고 그에게 물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학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세계, 즉 Umbelt에 대한 이해방식이라고 본다. 그러한 이해방식이라고 본다면 형이상학적 이해방식과 과학적 이해방식의 그 궁극적 메시지는 통할 수 있다. 적어도 논리적 구조에서는. 즉, 최한기의 메시지에도 현대물리학의 메시지는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여기서 전통을 공부하는 이들의 국수주의적 발언이 유도되어 최한기는 현대물리학자들보다 위대하다는 비약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이기 때문에 논리적 사유구조에 공통성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을 동일한 차원에서 학문적 성과로 바로 대비하는 것은 곤란하다. 도올 인터뷰 전문

경제학은 과학과 성격이 다른 학문체계다. 우리의 삶에 과학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과학은 기술(공학)적 발전이나, 드물게 사상적 영향력으로 가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공학은 과학의 직접적 응용이 아니다. 공학은 그 자체의 진화적 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과학과 상호작용한다. 하지만 경제학은 아니다. 경제학은 과학과 공학의 상호관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학문체계다. 경제학의 과학적 성격은 직접 경제학의 공학적 성격으로 전이된다. 경제학의 사상적 측면이 우리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과학처럼 간접적이고 지연된다.

현재의 세계적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칼 폴라니를 다시 읽는다고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폴라니를 사상사로 읽을 것인가, 혹은 문제해결을 위한 공학적 응용으로 읽을 것인가. 혜강이 현대 과학자들에게 실천적 측면을 제외하고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듯이, 폴라니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사상사에 대한 자각이 쓸모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현장에 있는 경제학자들에게 폴라니에 대한 공학적 강조는 무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우리가 폴라니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이론적 도그마에 대항한 일상의 반발, 추상적 단순화에 대항한 구체적 복잡성에 대한 강조, 과도한 일반화에 대항한 상식적 특수성의 확보 정도가 될 지 모른다.

아마도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는, 폴라니로부터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폴라니의 문제의식을 재확인하고, 현장의 방법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군의 경제학자들로부터 풀려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미 수십년도 더 되어버린 폴라니의 이론이 아니라, 아마도 폴라니를 직간접적으로 대면하고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실천을 고민하는 그런 현장의 인물들에게서 찾아질 것이다. 폴라니는 대안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강력하게 옥죄고 있는 경제시스템의 위기를 조금 더 일찍 자각한 사상가일 뿐이다. 그가 현장의 경제학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상적 세례이지, 문제해결이 될 수는 없다.

폴라니를 문제해결의 완벽한 지침서로 읽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사상이란 목표를 정해줄 뿐, 문제해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위대한 것은 사상의 세례를 받고, 땅에 발을 딛은 채 현실과 부딪히고 있는 공학자들이지 하늘을 나는 사상가들이 아닌 것이다.

A Post Entitled 물리학적 경제학에서 생물학적 경제학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posted 2 years ago

모스와 폴라니의 시도는 물리학을 닮아있던 경제학의 도그마들의 신화를 벗겨내고, 경제학에 역사적(진화생물학) 방법론과 실증적(생리학) 방법론의 세례를 주려했던 시도였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고(칼 폴라니),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었다(마르셀 모스).

쿤의 패러다임이 경제학에 들어맞는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여전히 경제학이 이론종속적이며 세속화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론의 도그마는 실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강화되며, 언제든 폭주할 우려가 있다. 물리학을 닮았던 경제학을 세속화 시키려던 일군의 노력, 그것이 폴라니와 모스가 분투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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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2 years ago

폴라니와 모스그룹은 각각 사회적 차원(경제적 제도)와 개인적 차원(행동동기)에서 시/공간적으로 인식범위를 확대한 인류학적 분석방식을 통하여, 자본주의체제의 경제영역만을 대상으로 한 주류경제이론의 경제주의적 인식론이 가지는 궁극적 난점을 규명하고 개념적 대체를 제시하려 시도했다. 이들의 주된 분석영역은 대칭적인 것이었지만 분석의 목적은 공히 현대사회에서 지배적 원리로 일반화되어 있는 왜곡된 시장원리를 수 천년 동안 인간사회에서 차지해왔던 본래의 의미로 정정하여 제자리에 되돌려놓는 데 있었다.

경제제도와 행동동기에 대한 경제인류학적 제안-칼 폴라니와 모스그룹의 경우를 중심으로, 최기춘 - 사회경제평론,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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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경제적 동물로 변하게 한 사회는 오로지 아주 최근의 우리 서구사회뿐이다. (주: 그 서구사회의 세뇌에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자각마저 없다)

마르셀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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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st Entitled ARS속의 마르셀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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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에게서 탄생한 -바타유에 따르면 ‘제한경제’, 모스의 학파에게서는 ‘교환경제’로 나타나는 -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개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바타유가 모스의 <증여론>에서 나타나는 선물의 경제를 ‘일반경제’로 지위 격상시킨 이유는 그가 살던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기도 하겠지만, 실생활 속에서 우리가 겪는 ‘선물의 경제’의 위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이 종합된 것이 칼 폴라니의 저술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ARS를 누를 때 우리는 지연된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다. 모스를 축으로하는 일련의 경제인류학자들 중 일부는 그 지연됨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우리는 이타성이라는 도덕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에서 청원이 있을 때, 오마이뉴스를 통해 도올을 후원했을 때, 어떤 형태로든 온라인으로 자선행위를 할 때, 우리는 어떤 보상을 기대하며 그것을 ‘선물’하는가. 그 설명은 심리학적인 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를 동원해야 하는 것인가. 게임이론과 죄수의 딜레마로 충분한 것인가, 해밀턴의 포괄적응도 이론으로 충분한 것인가. 모스의 전통과 다윈의 전통은 여전히 갈등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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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자선과 기부는 경제적 거래의 상호성의 논리를 따르는 교환의 경제적 장과는 다른 경제, 즉 선물의 경제이며 자본주의적 시장의 수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상품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바다 속에 떠있는 섬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기능을 하는 증여와 선물의 경제가 현대사회에서 갖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 받으며 자선을 하며 기부하는가? ARS에 참여하는 몰개성적 개인적인 기부의 경우나 <아름다운 재단>과 대기업 기부재단에서 볼 수 있듯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자선과 기부행위는 관대한 행위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공인된 신뢰를 창출하고 재창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합리화된다. 자선과 기부 행위가 관대함의 행위로 인정받고, 또한 그 혜택을 받는 수혜자로부터 감사의 형태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모스의 이른바 ‘집단적 기대’의 형태로 나타나며, 개인의 의식적인 의도라기보다는 ‘관대함’이라는 아비투스의 성향에 기인한다. 이 성향은 명시적이고 확실한 의도 없이도 상징적 자본의 보존이나 증가를 가능하게 하는데, 교육이나 관습을 통해서 획득되며,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법칙으로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일’로서 자발적으로 수행된다.

연구노트: 증여론과 증여의 윤리, 김성례 - 비교문화연구, 2005 -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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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르디외는 선물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라고 결론을 내린다. “관대함과 공평무사가 가능한가”라는 순수하게 사변적이고 전형적으로 학구적인 질문은 “선물경제가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공평무사와 관대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활용될 수단에 관한 정치적 질문이어야 한다”고 부르디외는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선물교환에서 등가적인 답례와 “진정한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상호주의 혹은 호혜주의를 배제하는 “지속적인 비대칭성”의 조건이 성립되는 경우, 명백하게 “가장 자선적이고 비용이 적게드는 교환관계, 예컨대 관심의 표명, 친절, 사려깊음 혹은 조언, 베푸는 행위, 자선”이 가능하게 되며 이런 것들은 “항구적인 의존관계를 창조하기에 용이하다”고 주장한다.

연구노트: 증여론과 증여의 윤리, 김성례 - 비교문화연구, 2005 -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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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 고대의 위계적인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선물증여의 호혜적 교환은,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경제에서 이루어지는 등가치적 교환이 아니라 비대칭적 위계적 교환으로서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포틀라치의 경쟁적인 과잉지출은 결코 공평무사한 것이 아니며 선물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위계질서를 정립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모스는 고대사회를 전적으로 이상향으로 낭만화하지는 않았다. 서구사회가 포틀라치의 위계질서와 그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의 공동저장소’에 대한 접근을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노트: 증여론과 증여의 윤리, 김성례 - 비교문화연구, 2005 -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p159

모스가 위대하게 느껴지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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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인들은 돈을 쫓아서 살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하거나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 죽전리 주민들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얻기 위한 경제적 계산은 도덕적으로 쉽게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면에서 경제주의는 한국인들의 삶에서 실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에게 권장됨으로써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관념 체계는 아니다

진필수, 「경제주의의 확산과 문화의 위기: 택지개발에 따른 토지보상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32-2, 한국문화인류학회, 1999년,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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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본적 사실로부터 출발하겠다. (…) 살아있는 모든 유기체는 원칙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 이 초과에너지는 기꺼이든 마지못해서든 또는 영광스럽게든 재앙을 부르면서든, 반드시 대가 없이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

사실 인간들은 아주 일반적으로 혼자서든 혹은 떼를 지어서든 끊임없이 소모의 과정에 참여한다. (…) 집단과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바로 이 불변의 자극이다. (…) 이렇게 해서 군사적 소모와 같이 실현된 파멸은 비생산적인 가치의 생성으로 연결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부조리하면서 우리를 탐욕스럽게 만드는 가치가 바로 명예다.

조르쥬 바타유(Georges Batailles) <저주의 몫>, 문학동네, 2004, pp.59-82. 참조.

A Post Entitled 동심원 이론: 마샬 샐린스(Marshall Sahl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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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 Sahlins, Stone Age Economics, Chicago, ALdine, 1972., Marshall Sahlins, Tribesmen, New Jersey, Englewoods Cliffs, Prentice Hall, 1968.

(샬린스에 따르면) 사회적 공간은 일련의 동심원과 같은데, 한 가운데에는 집과 가족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다음에는 차례로 친족, 마을, 그리고 부족이라는 동심원이 있으며 맨 마지막에는 부족들 간의 공간인 바깥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동심원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샬린스가 ‘전적인 상호성’이라 부르고 있는 전면적인 연대성, 즉 되돌려 받을 생각 없는 무조건적인 도움이 지배하고 있다.

한 친척 내의 교환도 대부분 이와 비슷하다. 마을과 부족에서의 교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호성, 정확히 말해서 ‘평등한 상호성’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를 주는 것은 그와 똑같은 것을 하나 되돌려 받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을에서 부족으로 그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되돌려 받는 데 걸리는 시간과 양상은 더 엄격하게 명시된다. 마을이나 부족의 교환에서 일어나는 약속불이행은 무엇이든 치명적인 과오가 된다. 이런 약속불이행은 가족이나 친척 사이의 교환에서는 용인되고 있지만, 그 바깥 영역에서는 더 이상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부족 바깥에서는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어떤 것을 획득하려는, 그러고도 벌도 받지 않는 여러 시도들, 즉 샬린스가 ‘부정적 상호성’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 지배하고 있다. 상대방의 피해 위에서 자신의 이득을 최대한으로 얻겠다는 목표 하에서 이 ‘부정적 상호성’은 단순한 거래로부터 시작해서 강탈 및 폭력, 약탈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으로 행해지고 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 기준에 따르면 가장 경제적인 교환들, 즉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키려는 교환들은 언제나 공동체 외부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원시사회에서는 이런 교환들을 폭력과 같은 범주에 넣고 있었다는 것이다.

_Paul Dumouchel et J-P.Dupuy, L’enfer des choses-René Girard et la logique de l’économie, Seuil, 1979. p.158. _

샬린스의 생각은, 주체로부터 가까운 동심원 안에서는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주고받는 ‘전적인 상호성’이 지배하고 있고, 비교적 가까운 사이에서는 똑 같은 대가를 기대하는 등가성을 중시하는 ‘평등한 상호성’이 지배하고 있지만, 관계가 먼 집단 사이에서는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획득하려는 ‘부정적인 상호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경제적인 교환을 원시사회에서는 폭력과 약탈과 같은 ‘부정적인 상호성’의 범주에 넣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일반경제를 향하여: 르네 지라르를 통한 경제논리 비판4, 김진식, 한국프랑스학논집 제 54 집 (2006) pp. 319~336

A Post Entitled 모리스 고들리에 (Maurice Gode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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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 도올이 만난사람> 인류학 거장 모리스 고들리에 佛고등사회과학원장

경제인류학 권위자 ‘모리스 고들리에’

모리스 고들리에: 우석훈

루이스 헨리 모건의 <고대사회>: 마르크스 엥겔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그 책. 야만-미개-문명의 건방진 도식이 나타나기도 하는 그 책. 더럽게 두껍지만 절판된 그 책. 이런책까지 읽기는 무리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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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의 생활도 샤일록의 생활도 모두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여론, 마르셀 모스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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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훌륭한 지혜는 인류 진화 과정 내내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원칙이었으며 영원히 그러할 이것을 우리의 생활원칙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또 의무적으로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틀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증여론, 마르셀 모스 p258-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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